바람이 제법 따뜻했던 봄. 그리고 옷 속에서 볼록한 아랫배가 딱딱하게 만져지던....시기. 
지난해 5월 18일. 병원에서 정밀초음파 검사를 했습니다.
정밀초음파 검사는 아기의 심장은 물론 내장들을 초음파로 보면서 혹시 기형 등의 문제점이 있는지 알아보는 검사입니다. 심장에 구멍이 있는 아기들이 종종 발견된다고 하더라고요. 간호사선생님 말씀으로는. 

흑백의 화면 속에는 '랑이(태명)'가 끊임없이 꼬물꼬물 움직였습니다.양수 속에서 엎드려있다가 뒤집었다가. 팔을 흔들었다가. 다리를 구부렸다가 폈다가...
화면에서 눈을 뗄 수 없었습니다.랑이가 벌써 이렇게 많이 컸다니. 눈도 두개. 콧구멍도 두개. 손가락도 10개. 발가락도 10개. 곧은 팔과 다리 등등'사람의 형태를 갖추었구나!'
초음파 검사를 할 때마다 랑이는 몰라보게(?) 자라있었습니다. 
멸치 모양에서, 곰돌이 모양으로, 졸라맨 모양으로, 그리고 이젠 사람 모양으로.




이 시기 랑이는 사람이 되기 위해 아주 중요한 '결정적 시기'들을 지나왔습니다. 

결정적 시기란 태아시기에 신체의 조직과 기관을 만드는 중요한 시기로, 세포가 빨리 분화하는 시기와 일치합니다. 그리고 이 시기의 영양섭취가. 랑이의 평생을 결정합니다.

엄마 뱃속에서 아기가 어떻게 자라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미래가 결정된다는 이론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일명, '태아프로그래밍 가설(베이커 가설)'입니다. 이 가설에 따르면 엄마 뱃속에서의 이 '결정적 시기'가 중요합니다. 발생의 결정적 시기에 일어나는 자극이나 손상이 아기의 건강에 평생 영향을 미칩니다. 

#1. 못먹은 아기 자라서 성인병 걸린다

보통 비만이면 성인병에 걸리기 쉽다고들 하지요?근데 최근 나오는 학설은 그 반대입니다. 뱃속 아기가 잘 못먹으면 성인병에 걸리기 쉽답니다.
왜그럴까요?태아는 엄마 뱃속에서 몸을 만들지요.장기는 물론 생명 유지의 핵심기관인 뇌까지 만듭니다. 
이렇게 중요한 기관을 만들 때 엄마가 적게 먹으면, 태아도 잘 못먹게 되죠. 그래서 태아 몸 자체가 조금만 먹고 살도록 프로그래밍됩니다.
엄마 뱃속에 있을 땐 태아가 그럭저럭 자라지만.
문제는 아기가 태어난 뒤입니다.
에너지를 적게 사용하도록 설계돼있는 아기가 음식을 풍족하게 먹게 되면 비만이 되기 쉽겠지요. 이는 곧 각종 성인병으로 이어집니다.

바커 가설에 대해 다룬 타임지 2010년 10월 4일자




#2. 바커 가설

바커 가설이 현상을 처음 발견한 사람이 영국 의사인 D. 바커(David Barker)입니다.

30년 전, 그는 지도를 보다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가장 빈곤한 지역에서 심장질환 발병률이 가장 높았습니다.

기름진 음식을 먹어야 생기는, 즉 부자들이나 걸리는 병이라고 생각했던 심장병이 빈곤지역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다니. 

이를 이상하게 여긴 바커는 연구팀을 꾸려 빈곤지역의 출생기록을 찾아다녔습니다.

다락방, 창고, 차고, 보일러실 등등을 구석구석 뒤진 끝에 드디어 20세기 초 동부 하트퍼드셔에서 당시 간호사가 신생아가 태어난 집을 가가호호 방문해 기록해 둔 수천 건의 기록을 찾는데 성공합니다. 이제 노인이 된 1만5000여명의 신생아를 추적해 출생 당시 체중과 이후의 건강을 비교했습니다.

결과는 놀라웠습니다.출생 당시 체중이 적었던 신생아일수록 중년에 심장질환에 걸릴 확률이 높았던 것입니다.그는 1989년 이 연구결과를 처음 발표했습니다.그러나 학계의 반응은 싸늘했습니다[각주:1]

당시 심장질환은 성인의 생활습관(식습관, 운동부족 등) 때문이라는 인식이 팽배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후 바커 가설은 다수의 연구에 의해 지지됐습니다.

또 하나의 사례가 있습니다.바커 가설의 최초 근거라고 여겨지는 이야깁니다. 

2차세계대전 당시 네덜란드의 '배고픈 겨울' 사건에서 태아기의 영양결핍이 성인병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증명됐습니다.

무슨 이야기인고 하니~
2차대전이 끝을 향해 달려가던 1944년 가을. 

다급해진 독일 나치는 네덜란드로 들어가는 모든 식료품의 수송을 전면 차단했습니다.

네덜란드가 유럽을 가로지르는 교두보 역할을 했기 때문이지요.겨울이 되자 식량이 부족해졌습니다. 

먹을 것이 거의 없어진 네덜란드 사람들은 전쟁 전 섭취하던 열량의 4분의1에 불과한 하루 500kcal만으로 연명했습니다. 

이때 임신한 여성의 뱃속에 있던 아기만해도 약 4만명. 

정부는 당시 임신부에게 여분의 식량 배급권을 줬지만, 태아의 발달에 무지했던 가족들은 임신부가 받은 여분의 음식을 형제 자매에게 나눠줬습니다. 

이때 태어난 아이들에 대해 출생기록부가 발견됐습니다.이를 토대로 베이커 박사가 추적을 했습니다.그러자굶주린 엄마의 뱃속에서 자란 태아들은 자라 비만, 높은 콜레스테롤, 고혈압, 당뇨, 심혈관 질환에 더 많이 걸렸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각주:2] [각주:3].


바커 가설이 정설로 자리잡은 것은 1995년 영국메디컬저널이 이 단어를 명명하면서 부터라고 알려져있습니다. 풍족해서 생긴다는 성인병이, 사실은 가장 부족할 때 발생하게 되는 이 역설이라니요. 

#3. 엄마의 과한 다이어트 금지
임산부의 과도한 다이어트가 아이의 건강을 해친다는 연구결과도 국내 연구진에 의해 속속 나오고 있습니다.


이 연구들의 공통점은.
엄마의 과도한 다이어트가 엄마 자신의 건강을 해치는데서 끝나지 않고 아이의 건강. 더 자세히 말하면 아기가 성인이 됐을 때 각종 성인병에 취약한 몸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무시무시하죠.

이화여대 산부인과 김영주 교수 연구팀이 지난해 대한산부인과학회지(Korean J Obstet Gynecol)에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식사량을 절반 이상으로 줄인 어미쥐에서 태어난 새끼쥐는 정상쥐에 비해 성장과정에서 대사장애와 두뇌발달장애를 보였습니다[각주:4]. 체중도 더 나갔습니다. 


연구팀은 실험쥐를 다음의 4그룹으로 분류해 실험했습니다.
어미쥐와 새끼쥐 모두 제한없이 먹이를 준 A그룹, 임신중인 어미쥐에 평소의 50% 먹이만 주고 새끼쥐에는 제한없이 먹이를 준 B그룹, 임신땐 먹을 것 다 줬지만 새끼는 먹이의 50%만 준 C그룹, 어미와 새끼쥐 모두 실험기간 50%만 먹이를 준 D그룹으로 분류했습니다. 


결과가 어땠을까요. 
새끼쥐가 잘 자라고있는지 출생 3주, 24주차때 새끼 쥐의 장기 무게를 쟀습니다. 그랬더니 엄마가 먹이를 절반만 먹은 A, D그룹 새끼쥐는 태어날 당시 장기 무게가 정상 이하였습니다. 
그러나 태어나서 영양을 잘 섭취하면(B그룹) 3주만에 정상으로 회복됐습니다. 그러나 24주째에는 태어날 때 정상보다 무게가 덜 나갔던 쥐들이 되려 정상보다 무게가 더 나갔습니다. 


따라잡기 성장이라는 현상 때문입니다. 
뱃속에서 적은 음식으로 살 수 있게 몸이 프로그램됐기 때문에, 태어난 뒤 정상 식사를 하면 되려 살이 찌게 되는 것입니다. 

김영주 교수 연구팀의 실험사진입니다. 왼쪽 쥐(rat)는 임신기와 수유기때 모두 충분히 먹이를 먹었습니다. 즉 대조군이에요. 반면 오른쪽 쥐(rat)는 임신기에 먹이를 평소의 절반만 먹었습니다. 사진에서 보시듯이 오른쪽 쥐....왼쪽 쥐에 비해 엄청 뚱뚱하지요. /사진제공 이화여대 의대 김영주 교수 연구팀




#4. 적당히 먹자

확실히 요즘.
잘 먹는 것은 곧, 적당히 먹고 적당히 움직이는 것이라는 말이 상식으로 자리잡은 것 같습니다.
다수의 연구결과도 이 말을 지지합니다.


이전 글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너무 많이 먹어도
그렇다고 너무 적게 먹어도 안된다는 것. 


이 글을 쓰면서 제 임신기간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나는 과연 잘 먹었나.
균형있게 먹었나.


시원이에게 제대로 된 몸을 물려주었나.
내가 임신기간 먹었던 음식이 시원이의 평생 건강상태를 디자인했다는 생각을 하면.
정말 생명은 경이롭고.
이 경이로움을 만들어내는 엄마의 몸은 신기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어땠냐구요. 
임신성당뇨 때문에 식단 첨삭(?)까지 받고, 잘 지켰으니 뭐 전 최선을 다해서 임신기간을 보냈다고.
스스로를 위안해봅니다.
쓰담쓰담. ^^



  1. 바커의 연구방법에 대한 이야기는 책 '오리진'에서 참고했음. [본문으로]
  2. 이화여대 산부인과 유재영 박사님 e메일 인터뷰. [본문으로]
  3. Tessa J. Roseboom and others/Effects of prenatal exposure to the Dutch Famine on adult disease in later life: an overview/Twin Research and Human Genetics(2001). [본문으로]
  4. Young Ju Kim/Effect of feed restriction during gestation and lactation period on changes in organ weight in rat offspring/Korean J Obstet Gynecol(201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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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캔디목